부산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 영화숙·재생원
어린이 사망하면 인분 늪이나 나무 밑에 암매장
살아남은 아이들은 암매장에 강제동원
유엔고문방지위원회, 6차 최종견해서
“수용시설 피해자는 고문 피해자” 첫 권고
피해생존자들, 진화위에 “유해 시굴하라”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아래 진화위)를 향해 사망자의 유해를 시굴하라고 요구했다.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아래 생존자협의회)와 시민사회단체들은 26일 오후 3시, 서울시 중구 진화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화위가 △사망자 유해 시굴 △유엔고문방지위원회의 6차 최종견해에 기반한 권고 등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죽도록 맞고, 죽어서도 맞고, 시신은 똥통으로
영화숙과 재생원은 부산시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이다. 처음에는 영화숙만 있었다. 영화숙은 1951년, 50여 명을 수용하는 소규모 시설로 설립됐다.
1960년대, 정부는 아동복리법, 생활보호법, 윤락행위등방지법 등을 제정했다. 이 법은 ‘부랑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을 납치해 강제수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이로 인해 ‘단속’이란 이름으로 납치·감금된 사람은 수만 명에 이른다.
국가의 단속정책 기조에 맞춰 부산시는 ‘부산시 재생원 설치 조례’를 마련해 재생원을 세웠다. 1964년, 영화숙·재생원은 800여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부산 최대 수용시설이 됐다.
영화숙·재생원에 수용된 피해자는 강제노역, 구타 등에 시달려야 했다. 사망하면 연고자를 확인하지 않고 장례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인분을 모으는 곳이나 미개발 지역 일대에 암매장됐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피해생존자 유수권(가명) 씨는 영화숙·재생원에서 일어난 인권침해 실태를 증언했다.
유 씨는 1954년생으로, 부산시에서 태어난 후 어릴 때 부두에서 엄마 손을 놓치고 넝마주이로 살았다. 13살 무렵, 밥을 사 주겠다고 꼬드기는 낯선 아저씨를 따라갔다가 5년간 영화숙에 강제수용됐다고 한다.
수용생활은 공포였다. 유 씨는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다. 옥수수를 캐거나 가축을 사육하는 노역을 했는데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죽도록 맞아야 했다. 밤에 대변을 참지 못했다는 이유로도 맞았다”고 기억했다.
감금된 아이들은 시신을 암매장하는 일에도 동원됐다. 유 씨는 “10명 중 9명은 죽었다. 죽은 아이들은 대부분 10대였다. 맞다가 사망해도 꾀병 부린 거라고 죽어서도 맞아야 했다”며 “원장은 시신을 유기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시켰다. 리어카나 작은 지게에 친구를 싣고 산에 묻었다. 가마니 한 장도 아깝다며 반 장으로 시신을 덮어 똥통 습지에 친구를 가라앉혀야 했다”고 증언했다.
암매장에 동원된 아이들은 친구를 제 손으로 묻는 중에도 맞아야 했다. 유 씨는 “원장의 말이 곧 법이라 친구를 잘못 묻으면 나도 맞아야 했다. 원장은 외진 곳에 잘 묻었는지 나무 꼬챙이로 푹푹 쑤시면서 확인했다”며 “(암매장한 곳은) 부산시 오물이 모이는 곳이라 사람이 드물었지만 (오가는)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숙에 5년간 수용됐다가 해외로 입양된 김성주 씨는 기자회견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오늘도 아침부터 빠따를 맞네. 언제 진 원수라고 오늘도 때립니까.”
이어 김 씨는 강제수용에 대한 피해를 증언했다. “방금 부른 노래는 영화숙에 수용된 아이들이 만든 노래다. 아직도 기억난다. 영화숙에 있던 매일이 지옥이었다. 영화숙 같은 수용시설은 두 번 다시 있어선 안 된다. 세계가 보고 욕한다”고 성토했다.
생존자협의회는 2022년 10월부터 유해를 자체 발굴하거나 부산시 사하구에 있는 암매장 추정 지역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 유엔고문방지위원회, 처음으로 수용시설 관련 권고
이 같은 증언은 세계로 알려졌다. 유엔고문방지위원회는 지난 7월 10일부터 이틀간 스위스 제네바시에서, 한국 정부가 제출한 제6차 국가보고서를 심의했다.
쉽게 설명하면 한국 정부가 유엔고문방지위원회에 고문방지협약 이행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고, 유엔고문방지위원회는 보고서를 검토하면서 한국이 고문방지협약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심의했다는 뜻이다.
손석주 생존자협의회 대표는 당시 심의 과정에 참석해 한국의 집단수용시설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를 증언했다.
당시 손 대표는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옆에 있는 친구가 죽어서 깨어나지 못했다. 시신은 들 것에 천만 덮여서 들려 나갔다. 친구들은 원장이 개발하는 간척지 옆 인분을 모으는 장소에 묻히거나 늪지대에 암매장됐다. 뒷산 소나무 뿌리 구덩이에 묻히기도 했다. 암매장된 친구들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정부는 아직 유해 발굴조차 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유엔 “한국, 고문방지협약 이행 미흡”… ‘시설수용 문제’ 최초로 지적)
심의를 마친 유엔고문방지위원회는 지난 7월 19일, 최종견해를 채택했다. 최종견해란 한국 정부가 제출한 6차 보고서의 성적표 같은 것이다.
유엔고문방지위원회는 최종견해에서 한국의 수용시설과 관련해 △고문 범죄화 및 시효 배제를 위한 입법 조치 △구금 초기 단계부터 변호인 조력권 보장 △정신보건시설 강제입원 및 입소 방지 △시설수용 및 과거사 피해자의 구제 보장 등을 권고했다. (관련 자료: 대한민국 제6차 국가보고서 심의에 대한 최종견해)
유엔고문방지위원회가 한국 정부의 고문방지협약 이행 상황을 6번 심의하면서 수용시설 피해생존자에 대한 구제와 배·보상을 권고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최한별 한국장애포럼 사무국장은 “유엔고문방지위원회는 국가폭력으로 인한 수용시설 피해자는 모두 ‘고문 피해자’라고 명확하게 말했다. 당사국(한국 정부)은 고문 피해자에게 완전한 구제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했다”고 설명했다.
‘완전한 구제’란 ‘효과적인’ 구제 조치를 뜻한다. 최 사무국장은 “유엔고문방지위원회가 말하는 효과적인 구제 조치란 원상회복, 손해배상, 재활, 만족, 재발 방지, 국가의 공식적이고 진정성 있는 사과, 명예회복, 진상규명, 진실에 접근할 권리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라며 “이에 따르면 사망자 유해 발굴도 효과적인 구제 조치에 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 사무국장은 또 “유엔고문방지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법을 제·개정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국가폭력으로 인한 수용시설 피해자가 공식적인 문제 제기, 즉 소송하지 않아도 배·보상, 만족, 재활 등을 포함한 ‘완전한 구제’를 받을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한국의 수용시설 피해자 구제는 각 피해자에게 맡겨져 있다. 진화위가 지정한 신청 기간이 지나면 신청서를 접수할 수 없고,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도 피해당사자가 직접 참여해 승소해서 피해자라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는 생활비나 의료비 지원도 신청 기간을 놓치거나 타지역에 살면 지원받을 수 없다.
이렇듯 한국 정부는 구제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겨 왔다. 유엔고문방지위원회는 한국이 법을 제·개정해서 피해자의 구제책임을 국가가 져야 한다고 권고한 것이다. 더불어 한국 정부가 수용시설 피해자, 즉 고문 피해자에게 어떤 구제를 했는지, 구제를 위해 어떤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 다시 보고하라고도 했다.
- 노인이 된 피해생존자들… 더 늦기 전에 유해 발굴해야
수용시설 사망자에 대한 국내 유해 시굴 사례가 이미 있다.
진화위는 2022년 9월 26일, 경기도 안산시 ‘부랑아’ 수용소인 선감학원 사망자 암매장 추정지에서 5일간 시굴 작업에 착수했다. (관련 기사: 선감도에 묻힌 한 풀릴까… 진실화해위, 유해 시굴 시작)
같은 해 10월 20일, 진화위는 선감학원 피해의 책임이 국가와 경기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국가와 경기도는 유해 발굴을 신속히 추진하고 적절한 추모 공간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관련 기사: 섬에 갇힌 아이들의 죽음… 선감학원 40년 만에 진실규명)
생존자협의회는 지난 7월, 김광동 진화위원장을 만나 영화숙·재생원 사망자 유해 시굴을 요청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손 대표는 “유엔고문방지위원회의 권고가 나왔지만 한국 정부와 국회는 우리 피해자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 수용시설 피해자인 우리도 한국 국민이다. 왜 모든 문제를 우리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하나?”라고 지적했다.
손 대표는 또 “가해자인 정부는 뭘 하고 있나? 내년 5월이면 (2기) 진화위 임기가 끝난다. 국가의 조사기관으로서는 유일한 진화위 임기가 끝나가는 동안 고령의 피해자들은 매일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피해자들 다 죽고 나서 입법할 건가?”라며 “정부와 국회, 진화위는 유엔고문방지위원회의 권고안을 즉각 수용하라”고 강조했다.
생존자협의회를 포함한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진화위를 향해 △고령의 피해생존자를 고려한 피해생존자 중심의 조사 △영화숙·재생원 희생자의 유해 매장 부지 시굴 △시설 부지 보존 방안 마련 △유엔고문방지위원회 최종견해를 반영해 수용시설 피해생존자에 대한 효과적인 구제책 권고 △영화숙·재생원을 포함한 집단수용시설 직권조사 및 인권침해 재발 방지 권고 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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