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관, 최초로 ‘영화숙·재생원 사건’ 피해 공식 인정
진화위, 국가에 유해발굴·구제책 마련·기록물 전수조사 등 권고
박선영 진화위 위원장 “지금이라도 국가가 책임져야”
부산시 “깊은 유감”… 시장 사과는 명확한 답변 피해
피해생존자들, 조사 결과 환영… “다신 아픔 없도록”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화위)가 ‘부산 영화숙·재생원 사건’을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판단하고 진실규명 결정을 했다. 진실규명 결정은 피해 사실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국가기관이 해당 사건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화위는 지난 2월 26일 오후 2시 부산시의회 브리핑룸에서 부산시와 함께 ‘영화숙·재생원 인권침해 사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진화위는 영화숙·재생원의 인권침해 내용을 상세히 알리고, 국가에 △공식 사과 △시신 암매장 추정 지역에 대한 유해 발굴 △피해자 공식 진정 없이 보상·재활서비스 구제책 마련 △피해자 트라우마 장기 치유 계획 수립 △권위주의 통치 시기 집단수용시설 기록물 전수조사 및 데이터베이스 구축 등을 권고했다.
- 시설에 끌고가 강제 노역·구타 및 가혹행위·성폭력 심지어 시신 암매장까지
피해생존자들의 절박한 요구 끝에 진화위는 2023년 8월 18일 직권조사를 결정했다. 이는 집단수용시설 인권침해에 대한 최초의 직권조사 결정 사건이었다. 진화위는 신청인 10명을 포함해 직권조사 대상자 171명을 확인하여 총 181명에 대해 진실을 규명했다.
영화숙과 재생원은 부산시 최대 규모의 ‘부랑인’ 집단수용시설이다. 영화숙·재생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국가폭력이 자행된 형제복지원의 전신으로도 불린다.
처음에는 영화숙만 있었다. 영화숙은 1951년, 26명을 수용하는 소규모 시설로 설립됐다. 1962년, 부산시는 재단법인 영화숙의 부지 내에 800평 규모의 재생원을 세웠다.
그리고 1962년부터 1971년까지 부산시는 ‘부랑인 수용 보호’에 대해 재단법인 영화숙과 위탁 계약을 체결했다. 법적 근거가 없는 시설에 민간에 대한 ‘단속’을 위탁한 것이다. 부산시는 영화숙·재생원, 실성원, 형제복지원까지 위탁 보호 계약을 이어갔다.
그렇게 피해자들은 ‘부랑인을 단속하겠다’, ‘사회를 정화하겠다’는 명목하에 경찰 및 영화숙·재생원 자체 단속반에 의해 불법적으로 강제 수용됐다. 18세 미만 부랑아들은 영화숙으로, 18세 이상 부랑인들은 재생원으로 끌려갔다.
피해자들은 열악한 생활 여건 속에서 강제 노역, 구타 및 가혹행위, 성폭력을 당하며 교육받을 권리조차 박탈당했다. 심지어 영화숙·재생원은 폭행 및 질병 등으로 사망한 원생들의 시신을 인근 야산에 암매장하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진화위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인 유수권(가명) 씨는 시설에서 일어난 인권침해 실태를 증언했다. (관련 기사: 똥통에 묻힌 시신들…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 “유해 발굴하라”)
유 씨는 13살 무렵, 밥을 사 주겠다고 꼬드기는 낯선 아저씨를 따라갔다가 5년간 영화숙에 강제수용됐다고 한다.
유 씨는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다. 옥수수를 캐거나 가축을 사육하는 노역을 했는데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죽도록 맞아야 했다. 밤에 대변을 참지 못했다는 이유로도 맞았다”고 기억했다.
그는 “10명 중 9명은 죽었다. 죽은 아이들은 대부분 10대였다. 맞다가 사망해도 꾀병 부린 거라고 죽어서도 맞아야 했다”며 “원장은 시신을 유기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시켰다. 리어카나 작은 지게에 친구를 싣고 산에 묻었다. 가마니 한 장도 아깝다며 반 장으로 시신을 덮어 똥통 습지에 친구를 가라앉혀야 했다”고 증언했다.
암매장에 동원된 아이들은 친구를 제 손으로 묻는 중에도 맞아야 했다고 전했다. 유 씨는 “원장의 말이 곧 법이라 친구를 잘못 묻으면 나도 맞아야 했다. 원장은 외진 곳에 잘 묻었는지 나무 꼬챙이로 푹푹 쑤시면서 확인했다”며 “(암매장한 곳은) 부산시 오물이 모이는 곳이라 사람이 드물었지만 (오가는)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 박선영 진화위 위원장 “지금이라도 국가가 책임져야”
26일 열린 기자간담회에는 박선영 진화위 위원장이 참석했다. 박 위원장은 “국가와 사회발전이 최우선이던 그 시절에 먹고 살기 위해서 길거리로 나온 수많은 아동들이 겪어야 했던 일련의 인권침해는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아픈 과거”라며 “진화위의 조사 결과는 사회 정화라는 명목으로 행해졌던 잘못에 대해 지금이라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이 규정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 존중이며 정의임을 천명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위원장은 “피해자분들의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많은 아픔들이 조사 결과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덜어지길 바란다”며 “국회 등 유관기관을 찾아가 아직 신청하지 못한 피해자분들의 입과 귀가 되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더 많은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광역시는 2019년 3월 ‘형제복지원 사건 등 피해자 명예회복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조영태 부산시 행정자치국장은 “부산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의 말씀을 드린다. 부산시는 인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모든 시민이 존엄과 평등을 누리는 사회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 행정차지국장은 “영화숙·재생원 피해자들에게 형제복지원 피해자와 동일한 지원을 할 것”이라며 “전액 시비로 피해자 본인 및 유족에게 위로금 1회에 한해 500만 원, 피해자 본인에게 생활안정지원금 월 20만 원씩 지원하고 의료비도 피해자 본인에게 연간 500만 원 한도 내에서 매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진화위와 부산시 측은 부산시장의 공식 사과 여부에 대한 질문에는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 피해생존자들, 조사 결과 환영… “다신 아픔 없도록”
기자간담회에는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들도 자리했다. 손석주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는 “과거의 잘못된 행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에 와서 과거의 잘못을 밝히지 않고 덮어버리는 일이야말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협의회 활동을 하며 이 일은 영화숙·재생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여전히 전국에서 수용시설 피해자들이 숨죽여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는 피해자들이 어떠한 아픔도 다시 겪지 않도록 해달라”고 전했다.
진실규명 대상자 장예찬 씨는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발언을 이어갔다. 장 씨는 “벌써 내 나이가 70이 됐다. 60년 전을 떠올리면 참으로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너무나 아픈 기억밖에 없고 살기 위해서 온갖 고통을 다 겪어야 했다”고 이야기했다.
장 씨는 “영화숙 친구들을 대신하여 이 자리에서 인사말을 전하게 되어 감회가 깊다”며 “진화위의 조사 결과가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가 되길 바란다. 피해자들이 남은 인생을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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