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전담 병원으로 지정된 공공 병원
‘노숙인 등’ 의료 공백 불가피
시민사회단체 “진료시설 지정 제도 폐지하라”
‘노숙인 진료시설’인 서울시 공공병원 6곳이 모두 코로나19 전담 병원으로 지정되면서, 홈리스가 이용할 수 있는 의료기관이 사실상 사라졌다. 홈리스의 의료 공백이 심각히 우려되지만 서울시는 수수방관하고 있는 상태다.
“‘노숙인 등’은 정해준 병원에만 가라”는 법
홈리스 중 거리 노숙인과 노숙인 시설 입소자는 의료급여 대상자다. 이들 ‘노숙인 등’은 일반 의료급여 대상자와 달리 아무 병원에나 갈 수 없다. 노숙인 진료시설로 지정된 공공병원에만 갈 수 있다. 그곳에서만 의료급여를 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의료급여법 시행 규칙 3조, 노숙인복지법 시행 규칙 5조에 따라 노숙인 진료시설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의료급여법 시행 규칙 3조에는 ‘노숙인 등인 수급권자는 노숙인 진료시설’에서 의료급여를 신청하라고 명시돼 있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노숙인 진료시설의 설치‧운영 및 지정 절차 등 의료지원에 필요한 사항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정한다’는 노숙인복지법 시행규칙 5조에 따라 노숙인 진료시설을 지정한다. 정리하면 ‘노숙인 등’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정해준 병원에서만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
노숙인 진료시설 중 80%가 보건소
그런데 10월 7일 기준으로 노숙인 진료시설로 지정된 278곳 중 224개, 약 80.5%가 보건소다. 보건소에서는 수술이나 입원이 가능하지 않다. 즉, ‘노숙인 등’이 질병을 적절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곳이 전체 시설의 20%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 ‘노숙인 등’이 갈 수 있는 병원이 코로나19 전담 병원으로 지정돼, 해당 병원이 외래 진료를 축소하면서 ‘노숙인 등’의 의료 공백은 더욱 커졌다. 서울시의 경우 노숙인 진료시설 중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공공병원은 여섯 군데다. 이 중 다섯 군데가 코로나19 전담 병원으로 지정됐다. ‘노숙인 등’이 갈 수 있는 병원은 시립 동부병원 한 곳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4일에 시립 동부병원마저 코로나19 전담 병원으로 지정되면서 ‘노숙인 등’이 병원에서 진료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사라졌다.
코로나19 상황, 홈리스 의료 공백 심각
코로나19 전담 병원이 외래 진료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박유미 서울시 방역통제관은 7일, “동부병원은 ‘노숙인 등’ 취약 계층을 위한 외래 진료를 유지할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병원마다 외래 진료를 운영하는 상황이 다른 실정이다.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8일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신규 입원을 받지 않거나 이전 진료 기록이 있는 환자만 진료 가능하다는 등 병원 운영 방침이 모두 달라 ‘노숙인 등’의 의료 공백이 메워졌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정 활동가는 노숙인 진료시설로 지정된 서울시 공공병원 모두가 코로나19 전담 병원으로 지정된 것을 지적하며 “‘노숙인 등’의 외래 진료가 제한적으로나마 가능하다 하더라도 코로나19 전담 병원은 말 그대로 감염병을 전담하는 곳인데 건강이 취약한 홈리스를 감염병 전담 병원에 가게 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 제도 폐지하라”
이런 상황에서 홈리스행동, 빈곤사회연대 등 42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2020 홈리스추모제공동기획단(아래 공동기획단)은 지난 3일,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홈리스의 의료 공백을 초래하는 진료시설 지정 제도 폐지를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실제 입원 치료를 받다 강제 퇴원 당한 홈리스 당사자가 참석해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안 아무개 씨는 노숙 중에 동부병원에서 수술한 후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으나 지난달 24일, 전담 병원 지정 예비 조치에 따라 퇴원 당했다. 안 씨는 “재활 치료를 다 마치지도 못하고 갑자기 퇴원하게 됐다. 다른 병원을 알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퇴원 처리됐다”며 치료를 계속 받을 수 있게 서울시가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공동기획단은 이날 기자회견문에서 “보건복지부는 노숙인복지법 시행 규칙을 통해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 제도를 강제해 ‘노숙인 등’을 차별하고 이들이 치료받을 권리를 축소했다. 이는 복지의 탈을 쓴 차별”이라고 성토했다.
또한 “서울시는 진료 공백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노숙인 등’을 지원하는 책임자로서 어떤 조치도 없이 방관하고 있다. 게다가 서울시의 ‘노숙인 등 의료지원 사업 운영계획’에는 ‘천재지변, 재난, 기타 불가피한 상황의 경우 일반 의료기관에서 진료 가능’하도록 하는 방침이 있다. 이렇게 제도적 근거가 있는데도 서울시는 진료시설이 폐쇄되는 현실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만 있다”고 비판했다.
장서연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또한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 제도가 폐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장 변호사는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 제도는 반(反)헌법적이고 위법한 제도다. 다른 의료급여에는 의료급여 기관을 지정하는 제한이 없는데 홈리스에게만 의료급여 기관을 특정 진료시설로 지정한 것은 헌법 제11조에 명시된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서울시는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을 확대하고 복지부는 의료급여법 시행 규칙에서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 제도를 삭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진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국장은 정부가 공공병상을 늘려야 한다고 했다. 전 정책국장은 “의료법상 모든 의료 기관은 환자를 거부할 수 없게 돼 있다. 오직 홈리스에게만 이런 차별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에 우리 의료인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며 “몇 안 되는 공공병원에만 홈리스 진료를 맡겨 놓겠다는 발상을 버려야 한다. 민간 병원이 코로나19 대응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도록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야 한다. 무엇보다 공공병상을 확충할 재정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성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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