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시설수용 종식·탈시설권리 보장 권고
장애인들, 가이드라인 발표일 맞춰 ‘탈시설지원법’ 제정 촉구
목적으로 ‘시설수용의 종식’을 명확히 규정
“탈시설지원법, ‘국민주권’ 사회로 가는 첫 단추”

“‘쓸모없다’며 시설에 버려졌던 저는 쓸모없지도 무능하지도 않았습니다. 중증장애인의 능력의 발현은 장애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 지원에 따라 얼마나 변화할 수 있는지 바로 제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애인 딸을 낳은 죄’로 저보다 하루 더 사는 게 소원이었던 어머니는 자립생활을 하는 저를 보면서 꿈 같다고 하십니다. 저희 가족은 이제 누가 누구를 책임져야 하는 의존과 돌봄의 부담에서 벗어나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시설은 모두를 죄인으로 만듭니다. 장애인의 삶은 가족의 책임이 아닙니다. 국가가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지원을 해야 합니다.” (조상지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활동가)

9일,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긴급상황을 포함한 탈시설가이드라인’(아래 탈시설가이드라인) 발표 3주년을 맞아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아래 탈시설연대) 등 장애계가 국회에서 ‘장애인 탈시설 지원 등에 관한 법’(아래 탈시설지원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과 토론회를 열었다.

9일 오전 11시, 국회 앞에서 열린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 현장. 참가자들이 주먹 쥔 손을 높이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김소영
9일 오전 11시, 국회 앞에서 열린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 현장. 참가자들이 주먹 쥔 손을 높이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김소영

- 22대 국회 탈시설지원법안, ‘시설수용의 종식’을 목적으로

탈시설가이드라인은 코로나19 대유행 시기를 거쳐 2022년 9월 9일 발표됐다. 팬데믹을 통해 폐쇄적인 시설의 위험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국제법에 따른 의무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장애인은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의 시설에 수용되고 있다. 위원회는 탈시설 과정이 유엔장애인권리협약과 일치하지 않으며 지체되고 있음을 발견했다”며 가이드라인 제정 목적을 설명했다.

탈시설지원법안은 2020년 12월 10일 21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는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선민 조국혁신당 의원이 대표 발의를 준비 중이다.

이번 탈시설지원법안은 21대 국회 발의 법안에 포함되지 않은 탈시설가이드라인의 내용을 반영했다. 목적부터 ‘시설수용의 종식’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그 외에도 △장애인생활시설 범위를 장애인거주시설뿐 아니라 장애인·정신질환자가 거주하는 모든 시설로의 확대 △시설의 단계적 감축 △법적 능력이나 의사소통 능력 등을 이유로 자립생활 권리를 부정할 수 없다는 원칙 등을 포함한다.

또한 △시설 입소를 장애인 복지의 한 형태로 보거나 개인 선택으로 간주하지 않고, 시설의 신규 설치와 신규 입소·전원을 금지 △시설거주장애인의 가족에 부양의무 요구 금지 및 지원 대책 마련 △국무총리 소속의 중앙탈시설위원회와 지자체 소속의 지역탈시설위원회 설치 △시설근로자의 고용안정 지원 기본계획 수립 등 국가와 지자체의 책무를 강화했다.

탈시설지원법안은 지난 2월 제정되어 2027년 3월 시행 예정인 ‘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 및 주거 전환 지원에 관한 법률’(아래 자립지원법)과도 차이가 있다.

이날 오후 2시 국회도서관 소강당서 열린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이주언 공익법단체 두루 변호사는 “자립지원법은 시설거주장애인 중 자립을 희망하는 사람의 신청에 따른 지원을 중심으로 하고 탈시설권리나 시설폐쇄에 대한 규정은 포함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 변호사는 “반면 탈시설지원법은 모든 장애인의 지역사회 생활 권리를 보장하고 시설의 단계적 폐지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특히, 인권침해가 발생한 시설에 대한 엄중한 조치와 피해자에 대한 탈시설 지원을 강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토론회에는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과에서 참석했으나 탈시설지원법에 대한 명확한 입장은 확인할 수 없었다. 정순애 장애인정책과 서기관은 “자립지원법과 탈시설지원법이 일부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지적하며 “‘시설에 대한 선택도 선택이냐’는 문제는 신중히 검토해야 하며,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회 소강당에서 열린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 토론회 중 토론자들이 단상 위에 앉아 있다. 사진 김소영
국회 소강당에서 열린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 토론회 중 토론자들이 단상 위에 앉아 있다. 사진 김소영

- “탈시설지원법, ‘국민주권’ 사회로 가는 첫 단추”

앞서 오전 11시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에는 많은 탈시설 당사자가 참석했다.

김탄진 탈시설연대 서울지부 활동가는 9살에 시설에 들어가 2009년 탈시설했다. 32년을 시설에 수용된 것이다.

김탄진 활동가는 “야구방망이를 비롯해 여러 도구로 폭행을 당했던 일, 제대로 된 밥을 주지도 않으면서 시간 내에 밥을 먹지 않으면 못 먹게 하고 아예 굶게 했던 일. 그 외에도 시설에서는 너무 많은 폭력이 있었다. 폭행은 일상처럼 반복됐고, 아플 땐 제대로 관리도 해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어 시설을 나오게 되었다”고 AAC(보완대체 의사소통) 기기를 통해 이야기했다.

김 활동가는 “세상이 이렇게 좋은 건지 알게 된 건 내 나이 41살이었다. 32년 만에 얻은 자유였다. 먹고 싶은 음식도 먹고 나만의 좋은 집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지금의 나는 너무 행복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고 사이버대학을 다니면서 학점도 취득했다”며 “시설에 있는 이들도 탈시설해 모두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김탄진 탈시설연대 서울지부 활동가가 AAC(보완대체 의사소통기기)를 통해 발언하고 있다. 그의 앞에는 “시설은 지옥이다!!”라고 적힌 종이 피켓이 놓여 있다. 사진 김소영
김탄진 탈시설연대 서울지부 활동가가 AAC(보완대체 의사소통) 기기를 통해 발언하고 있다. 그의 앞에는 “시설은 지옥이다!!”라고 적힌 종이 피켓이 놓여 있다. 사진 김소영

신경수 탈시설연대 인천지부 활동가는 발달장애인과 지체장애인이 함께 있는 장애인거주시설 ‘한사랑마을’에서 21년간 수용되었다가, 지난 2009년 탈시설했다.

신 활동가는 “시설에서 나와 자립해 사니 야학도 다니고, 여행도 간다. (시설에서와 달리) 지금은 자유롭고, 행복하다”며 “22대 국회가 탈시설지원법을 통과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한별 한국장애포럼 활동가는 “탈시설가이드라인은 탈시설 당사자를 ‘생존자’라고 말한다. 이는 시설수용 그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참혹한 범죄인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최 활동가는 “이재명 정부를 ‘국민주권 정부’라고 한다. 그렇다면 시설에 갇혀온 이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고 그에 응답해야 한다”며 “탈시설지원법은 모든 준비가 끝난 뒤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져야 할 법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사회가 ‘국민주권’으로 가는 첫 단추로 시작되어야 할 법”이라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비마이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