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코로나시대, 싸우는 사람들의 안부를 묻다⑤
거리의 장사꾼들, 노점상인

보수세력의 8.15 집회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코로나19 감염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한창 시행 중이던 9월 2일 새벽이었다. 마포구청은 기습적으로 마포역 인근의 ‘한국전력공사 마포용산지사’ 담벼락에서 장사하던 노정상인들의 포장마차 6대 중 5대를 수거해갔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로 상가영업을 9시까지로 제한하던 시기, 노점상인들 또한 방역에 협조하는 의미로 장사를 중단하고 인근 보관소에 마차를 맡기고 있던 때였다. 그렇게 잠자고 있던 마차를, 구청은 한밤의 도둑처럼 가져갔다. 이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소속의 서부지역(아래 서부노련)은 마포구청을 상대로 매일 상복 투쟁과 마포구청 인근을 도는 차량행진을 벌이고 있다.

마포구청 앞에 곰인형 수십 개가 놓여 있다. 인형들은 머리에 ‘단결 투쟁’이라고 적힌 붉은 색 머리띠를 메고 규탄하는 문구가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코로나로 ‘10인 이상의 집회’가 금지되자 서부노련은 이처럼 곰인형으로 아바타 집회를 열었다. 이는 언론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사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마포구청 앞에 곰인형 수십 개가 놓여 있다. 인형들은 머리에 ‘단결 투쟁’이라고 적힌 붉은 색 머리띠를 매고 규탄하는 문구가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코로나로 ‘10인 이상의 집회’가 금지되자 서부노련은 이처럼 곰인형으로 아바타 집회를 열었다. 이는 언론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사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그러나 비단 이곳 서부노련 한전지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국적인 방역 위기로 각 지자체에서는 5일장을 휴장하거나 노점장사를 쉬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많은 노점상은 적극 호응하면서 장사를 쉬어주었으나, 이 기회를 틈타 노점하던 자리에 화단을 놓고, 5일장을 폐쇄해 버리는 일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한전지부가 있는 곳은 꼼장어, 오돌뼈 등의 안주와 함께 간단하게 술 한잔할 수 있는 포장마차 6대가 모여 장사하던 거리이다. 한전지부 회원들은 6대 중 5대의 마차를 빼앗긴 후, 남아있는 마차 한 대로 투쟁기금 마련을 위한 합동장사를 하고 있다. 장사를 하고 있으면 많은 직장인들이 찾아와서 ‘힘내라’는 응원도 해주고, ‘포장마차도 있어야 우리가 갈 곳이 있는데 구청은 정말 너무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시민들도 많이 만난다.

일흔한 살의 나이 한옥순 한전지부 지부장도 그곳에서 꼼장어를 굽고 오돌뼈를 볶는다. 한옥순 지부장은 이곳에서 88년부터 장사를 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은 학생회에서 한전지부와 연대관계를 맺고 다양한 사업을 진행했는데, 나 또한 새내기 시절부터 함께 연대하며 투쟁해왔다. 졸업 후엔 서부노련에서 상근하면서 지금까지 18년이라는 인연을 이어왔다. 한옥순 지부장과 길다면 긴 인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눈 대화와 기억을 그대로 글로 옮긴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마포구청 직원과 경찰들은 주변을 돌며 싸늘한 감시를 멈추지 않았다.

# 어느 날 갑자기 화단과 맞바꿔진 생존의 자리

- 얼마 전(10월 20일) 마포구청 앞에서 투쟁하면서 삭발을 했는데 저는 지부장님 삭발하는 모습 보면서 참 가슴 아팠어요. 그때 지부장님 심정은 어땠어요?

내가 사실 유방암 때문에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머리가 다 빠졌었는데, 이제 조금 괜찮아져서 머리가 조금 자랐는데 솔직히 아까운 마음도 있긴 했지. 근데 마차 빼앗기고 한 달을 넘게 투쟁하면서 우리 서부노련 회원들 고생시키고 내가 참 고맙고 미안한 심정이야. 그래서 내가 삭발한 거, 그거는 희생이라고 보면 안 돼. 나 하나 정당하게 함으로써 다 편해진다면 한다! 그까짓 못 할 게 뭐 있어? 그런 마음으로 내가 싹 쳐 버렸지. 진짜 다시는 이렇게 고생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거지.

10월 20일 마포구청 앞에서 열린 마포구청규탄 집회에서 한옥순 지부장이 삭발하고 있다. 사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10월 20일 마포구청 앞에서 열린 마포구청규탄 집회에서 한옥순 지부장이 삭발하고 있다. 사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 이번에 마포구청에서 마차 가져갈 때는 어떤 상황이었나요?

우리가 8월 정도 되면은 전부 휴가야. 직장인들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휴가철이 되니까 장사도 안되고 해서 우리 자체 내에서 해마다 8월 초에 휴가를 들어가. 길면 한 달, 짧으면 20일 정도. 여름철 위생관리도 있고 손님도 없고 하니까 8월 7일부터 쉬기로 한 거지. 그러다 이제 장사를 하려고 보니까 코로나 2.5단계 그게 걸린 거야. 9시까지만 장사하라고 하는데 우리 포장마차는 보통 9시는 돼야 첫 손님이 들어올 때도 있고. 그래서 (9시까지만 장사하면) 장사를 피자마자 치워야 되니까, 방역지침도 따르는 겸 해서 차라리 더 쉬기로 하고 구청에도 그렇게 한다고 통보를 했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지나가던 분이 전화가 와가지고 “아이고 포장마차 하는 자리에 화단 갔다 놨어” 그러길래 깜짝 놀라서 보니까 장사하는 자리 사이사이에다 갖다 놓는 거지.

- 그럼 처음에는 마차 가져간 것은 몰랐던 거네요?

몰랐지. 그래서 이상해서 마차 세워논데를 가봤지. 가서 보니까 싹쓸이를 한 거야 싹쓸이를. 마차마다 딱지를 하나씩 붙여 놓고 그냥 끌고 가버린 거야. 전날 저녁에도 한 회원은 장사할 준비 하려고 깨끗이 정리하고 마차 다이(받침대의 일본식 표현)가 흔들흔들하니까 새로 250만 원 들여서 다시 맞춰 갔다놨고 나도 80만 원 들여서 포장을 새로 해놨는데 싹 그냥 가져갔던 거지. 너무 황당한 건 구청 면담할 때 팀장이 상생위원회 한다고 절대로 마차 안 가져갈 거니까, 손도 안 대고 우리가 다 대화로 풀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바닥에다 계고장 붙여놓고 이렇게 해버린 거지.

- 8월부터 장사를 안 했으면 벌써 세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상인분들 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대출받아서 쓰고, 보험 약관 대출 있잖아. 그리고 조금씩 자식들한테 용돈 좀 받아 쓰고 하는데 자식들도 힘든데 다들 어려운 상황이지.

회원들이 장사하던 자리에 놓인 화단. 사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회원들이 장사하던 자리에 놓인 화단. 사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서울시의 노점 정책은 기본적으로 기존 노점은 보장해 주면서 신규 노점은 억제하는 방식이다. 물론 민주노점상전국연합은 이러한 정책 방향에 동의하지 않는다. 보통 노점상 단속은 자진철거를 유도하는 계고장을 여러 차례 발부하고 행정대집행 영장 발부 후, 기간을 정해 집행한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이를 노점당사자에게 통보하고 그 결과를 서류로 남겨놔야 한다. 그러나 이번 마포구청의 집행에는 이러한 절차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심지어 집행 영장조차도 당사자 통보가 아닌 기습적으로 바닥에 붙여놓고 가는 불법 집행이었다. 단속 후에도 해당 관청은 수거한 물건을 주인이 요구하면 내어 주게 되어 있음에도 현재 마포구청은 이마저도 무시하고 있다.

# 가난이 싫어 상경했는데 여전히 가난과 함께 산다

- 지부장님 인생 이야기 좀 듣고 싶은데요. 고향이 어디신가요?

내 고향은 충청도하고도 아주 깡촌인 영동 황간이었어. 우리 아버지는 옹기 만드는 일을 하셨고, 어머님은 그 옹기를 장날이면 내다 파셨는데, 이거 팔아서는 우리 8남매가 먹고살기에는 너무나 힘들었어. 오빠라고 하나 있었는데 있으나 마나였고, 부모님 일 나가시면 집안 살림을 내가 다 했거든.

- 서울에는 언제 올라오신 거예요?

17살 때 아는 사람 소개로 식모살이하러 마포로 왔지. 식모살이하다 지금의 남편도 만나고 아이도 생기다 보니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렵더라고. 애 둘 낳고 남편 돈벌이도 시원치 않고 먹고 살기가 더 힘들어져서 내가 다니던 교회 밑에 점심때만 식당일을 다녔는데, 한 달 내내 일해도 18만 원밖에 안 되더라고. 그래서 여기저기 식당 다니고 뭐 하다못해 스웨터 짜는 공장에도 다녔지. 정말 징글징글했어.

한전지부는 투쟁기금 마련을 위해 단속현장에서 합동장사를 하고 있다. 장사 준비를 하고 있는 한옥순 지부장. 사진 서부노련
한전지부는 투쟁기금 마련을 위해 단속현장에서 합동장사를 하고 있다. 장사 준비를 하고 있는 한옥순 지부장. 사진 서부노련

- 그러다 노점장사는 어떻게 하게 되었나요?

식당일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식당 앞에 포장마차가 몇 달 동안 계속 세워져 있더라고.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마차 임자를 찾았는데 그 양반이 몸이 성하지 않아서 장사를 더는 못한다고 나보고 할 수 있으면 장사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때부터 포장마차를 하기 시작한 거야.

- 처음 노점장사 시작할 때 이 동네 분위기는 어땠어요?

그때는 여기가 전부 다 주택이었고 아파트가 딱 하나 있었는데, 그 아파트 이름이 진주 아파트였지. 지금 그 자리에 자이아파트가 지어진 거야. 지금 염리초등학교 학부모들이랑 이 아파트에서 그렇게 우리를 철거하라고 민원 넣는다고 하는데, 그때 여기 살던 사람들 중 대부분 남자들은 노동일을 하고 아줌마들은 식당일을 주로 많이 다녔지. 그때 여기엔 별의별 일하는 사람들이 다 있었어. ‘마포종점’ 노래 알아? 여기 바로 앞이 그 전차 종점이었어. 내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여기 전차가 있어서 엄청 신기했지. 정말 느렸어.

내가 노점장사를 시작한 게 아마 30대 중반, 33년 전이니까 보자, 지금 내가 71살이니까 88년이겠네. 올림픽 열리기 얼마 전이었으니까 88년이 맞네. 그때 구청에서 서울올림픽 때 외국인들이 많이 온다고 포장마차 치워달라고 하더라고, 장사하지 말라고 아주 무섭게 강압적으로 나와. 솔직히 무섭기도 하고 ‘정말 장사하면 구청에서 마차 뺏어갈까?’ 의심도 들었지. 그래도 난 절대 못 빼준다고 했지.

- 구청에서는 외국인 오는 거랑 포장마차랑 무슨 관계가 있기에 마차를 빼달라고 한 거에요?

아, 외국인들이 보면 안 좋다는 거야. 창피하다는 거지. 먹고 사는 게 먼저니까 ‘나는 그렇게는 못 한다’ 그놈들한테 얘기하고서는, 우리 노점상들이랑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무 소리도 안하고 다 장사하게 만들었지.

88년 6월, 노태우 정권은 마차보관소 폐쇄를 비롯한 대대적인 노점단속을 벌였다. 이에 맞서 6월 13일, 수천 명의 노점상이 성균관대 금잔디광장에 모여 항의 집회를 열고 서울시청까지 진출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3일간 이어진 투쟁의 성과로 노점상들은 올림픽 기간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의 노점상단체가 결성되었다.

2009년 자식 같은 마차와 함께. 사진 서부노련
2009년 자식 같은 마차와 함께. 사진 서부노련

# 자식 같은 나의 소중한 마차가 박살나고 절단나고

- 88년 단속 이후에는 특별한 단속이 없었나요?

여기가 단속을 88년도 그쯤 한번 크게 하고, 지금까지도 마차가 몇 번 실려 갔지. 실려 가고 도로 찾아오고 그러기를 수없이 했지. 그리고 그때는 구청에서만 단속한 게 아니라 방범대원, 경찰 너나 할 것 없이 단속하면서 정신이 없었지. 나도 처음에는 단속 나오면 사정도 해보고 뒷돈도 찔러도 줘보고 ‘어떻게 하면 편하게 장사할까’ 이래저래 해봤는데 이것들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더라고. 돈은 돈대로 처먹고 때 되면 단속해서 유치장에 가두고 벌금 내고, 그래서 어느 날인가는 너무 화가 나서 경찰서에 쳐들어가서 도대체 왜 이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 난리 핀 적도 있어.

2009년인가, 2010년인가에는 아주 마차를 아작내서 가져갔어. 보는 앞에서 집게차(폐기물 처리하는 차량)를 가져와서 다 작살을 내놨어. 그거 마차 하나 만들라면 몇백만 원이 드는데…… 내 마차는 그때 멀쩡히 가져갔는데, 가서 보니까 아주 그냥 절단을 내놨더라고. 에이 징그런 놈들.

- 저도 그때 기억이 나는 거 같아요. 제가 연대 왔다가 돌아간 날이었던 것 같은데…

맞아. 그때 학생들이 연대 왔었는데 새벽 한 시 반이 넘어서 ‘오늘 안 나올란가보다’하고 학생들 돌려보냈는데 가자마자 새까맣게 용역들이 몰려나오더라고, 아마 2백 명은 족히 넘었던 거 같아. 주변에서 망보고 있다가 학생들 가는 것만 기다린 거야. 여자용역들 네 명씩 조를 짜서 우리 노점회원들 꼼짝도 못 하게 감금시켜놓고 내 소중한 마차와 물건들을 우리 보는 앞에서 다 부숴버리고 박살 냈지. 그 당시 내 옆에 있는 회원은 억장이 무너져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어. 나도 같이 울 수는 없어서 그 용역들 뚫고, 그나마 내가 건진 게 버너 한 개하고, 작은 리어카 하나하고, 딱 두 개 건졌나 봐.

- 지금은 회원분들이 6명인데 옛날에는 엄청 많았다고 들었어요. 처음 장사 나오셨을 때 여기 마차 몇 대나 있었나요?

여기? 여기 처음에는 25대인가 있었지. 그런데 92년도였던 거 같아. 노점 그만하라고 구청에서 500만 원씩 빌려준다는 거야. 그거 500만 원 갖고 어디 가서 뭘 하냐고, 가게 하나 얻으려 해도 권리금도 못 내는 돈인데. 난 나가지 말라고 엄청 말렸는데, 그래도 그때 많이 나가더라고. 세월이 흐르면서 나이 들어서 못하고, 장사 안되서 떠나고 하다 보니 이제 6명 남았네.

- 장사가 안돼서 떠났다고 하셨는데 옛날에 비해 최근에 장사가 안되는 이유가 뭘까요?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 사람들의 생활이 삶에 쪼달리는게 있을 것이고, 살다 보면 사람들이 술 한 잔 먹고 싶은데도 못 먹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흥청망청 술 먹고 싶어도 돈이 없잖아. 애로 사항이 많지 뭐 여러모로. 한 10년 전만 해도 새벽 4시, 5시까지 손님이 있고, 해가 뜨는데도 안 가고 마냥 앉아서 속을 썩였는데 지금은 깔끔하지. 1시 되면 치우기 시작하고 2시 되면 다 치우고 들어가거든. 그래도 그때는 젊음이 좀 있었으니까 진짜 밤새고 해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잠 못 자고 하룻밤 지나고 나면 일주일은 쉬어야 되니까.

이제는 나이 들어서 체력도 안 되는데 그렇다고 자식들도 어렵게 사는데 자식들한테 손 벌리고 싶지도 않고, 내가 얼마나 장사 할 수 있을까는 모르겠는데 구청에서는 그나마 용돈벌이라도 하는 걸 못 하게 하지. 나이는 먹어가지 몸은 아프지, 그렇다고 장사가 잘돼서 재미있는 것도 아니지, 구청은 구청대로 단속하지, 사는 게 힘들어. 이제는 너무, 사는 게 힘들어.

서부노련에서 개최한 노점 생존권 사수 집회에 참가한 한옥순 지부장. 사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서부노련에서 개최한 노점 생존권 사수 집회에 참가한 한옥순 지부장. 사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 코로나19 시기 생계지원에서조차 차별받는 노점상

- 올 초부터 전국적으로 코로나가 강타했는데 코로나 전후로 달라진 면이 있나요?

많이 달라졌지. 일단 장사를 못해 서 달라졌고, 우리가 평소에 하던 것들, 하고 싶었던 것을 못 해서 달라졌지.

- 이번에 코로나 2차 재난지원금이 소상공인들에게 지급됐는데 혹시 노점상들도 받았나요?

안 줬지.

- 왜 노점상은 제외됐을까요?

그러게, 그거 줄라면 다 주지 왜 노점상은 빼놓고 주는지.

- 말로는 노점상은 실제로 하는지 검증할 수 없다고 못 준다는 거였는데.

아니, 무슨 노점상을 하는지 안하는지 검증을 왜 못 해? 구청에다 물어보면 다 아는데, 말도 안 되는 거지. 그런데 안 잡아먹으면 다행이야, 구청 놈들이 정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렇게는 안 하지. 주기는커녕 있는 것도 가져가 버리니. 어쩜 이렇게 하나도 안 남겨 놓고 싹 가져갔는지 정말 징그러운 놈들이야.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구청에서 뭘 어떻게 하건 우리는 이길 거야. 처음에는 나도 구청 직원이고 과장이고 간에 인간적으로 저 사람들도 자기 일이니까 그러려니 봐주려고도 했는데, 이제는 나도 악이 받쳐서 눈에 띄기만 해도 화가 치밀어서 못 살겠어. 끝까지 싸워야지. 싸워서 이겨야지.

코로나 시대, 노점상은 국가에 특별한 뭔가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하나의 경제 주체로 인정하고, 적어도 이 시기에 먹고사는 삶의 터전을 철거해 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면 노점상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

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 최고령 회원 두 사람이 “노점상도 사람이다”, “용역깡패 물러가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 최고령 회원 두 사람이 “노점상도 사람이다”, “용역깡패 물러가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필자 소개

김두환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조직실장.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탄압받는 민중들 앞에서는 열심히 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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